花雲의 배움터/명시선집 1

허무혼의 독백 / 오상순

花雲(화운) 2011. 7. 21. 11:35

 

허무혼의 독백 / 오상순 [1894~1963 서울]

 


하염없이 스러져가는 연기 끝에도 한 실재의 발자국!

땅 위에 굴러 떨어지는 가련한 한 송이 꽃 속에도

그이의 그윽한 한숨!

나의 얼굴을 스쳐 지나가는 가벼운 바람 가운데도

그이의 미소!

하염없이 스러지는 촛불 밑에도 그이의 휘파람 소리!

창 틈을 새어 들어오는 티끌 속에도 그이의 눈동자!

깊은 침묵 깜깜한 어둠 속에도 그이의 우레 소리!

 

허무혼은 누구나 엿들을세라 가만히 일어나서 들창 틈으로

엿보아가며, 입도, 채 떼지 못하고, 알 수 없는 소리로

가만히 혼자 중얼중얼, 고개를 외로 기울이며-

허무의 문 열리는 별안간 무엇의 소리에 깜짝 놀라,

숨을 끊고 멍멍히 뻣뻣히 서다, 눈도 깜적이지 못하고.

허무의 밤은 깊어간다.

 

 

[자유문학사 1987년. 1920년 ‘폐허’ 동인으로 출발]